이 효열각은 본래 전라남도 순천지방에 있었던 것인데 한국민속촌을 건립하면서 원형대로 지금의 위치로 옮겨 놓았습니다.
효열각 안에는 여타 효열각에서 볼 수 있는 정려문 판액(板額)이 현수되어 있지 않으며 대신 황효부기행비(黃孝婦紀行碑)라 종액(縱額)된 비가 있습니다.
이로보아 기능적인 측면에서 ‘황씨효열비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황씨는 경주김씨 문중으로 출가하여 종주(瑽柱)의 처가 되었는데 곧 장수황씨(長水黃氏) 방촌(厖村) 황희(黃喜)정승의 자손입니다.
황씨부인은 시댁인 경주김씨 문중으로 시집을 온 후 사친지도(事親之道)를 다하여 시부모를 공경하고 정성으로 섬겼음으로 종당(宗黨 : 집안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으며 온 마을에서 칭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불행히도 시아버지와 남편이 이질(罹疾)에 걸려 일어나지를 못함으로 숙수지공(菽水之供)으로 변을 맛보아가며 시아버지와 남편의 질병을 구환하는 한편, 이들의 병을 대신 앓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남편과 시아버지가 운명을 하려고 하자 손가락을 베여 피를 입에 흘려 넣어 3일간 수명을 연장케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효행과 남편에 대한 열행이 알려지자 향당이 칭송하여 비를 세웠는데 정삼품 통정대부 순천군수 비서원승(秘書院丞) 경주(慶州) 김석구(金錫九)가 비문을 짓고,
순천 유림대표 장전기(張琠基)가 기행비(紀行碑) 건립추진위원회 유사(有司)가 되어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비의 몸돌은 오석이며 방부개석형며 전면에는 “효부유인장수황씨지기행비(孝婦孺人長水黃氏之 紀行碑)”라 새겼고 측면에는 “황효부기행비음기(黃孝婦紀行碑陰記)”라 쓰고 황 효부의 행실을 기록하였습니다.
효열각은 전면에 일각문을 세우고 사방에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효열각은 정평주초위에 원주를 세우고 지붕은 겹처마에 한식골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며 모로단청을 시문하였습니다.
벽면은 사방에 홍살창으로 마감하였고 포식공포에 익공형살미로 장식하였고 사방 추녀는 활주초석위에 활주를 세워 받쳤으며 외관이 미려합니다.